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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래

동연혁
연혁
1413년 금천현 동면 가리산리
1795년 시흥현 동면 가리산리
1895년 05월 26일 인천부 시흥군 동면 가리봉리
1895년 05월 26일 인천부 시흥군 동면 가리봉리
1963년 01월 01일 시흥군 동명 5개리(시흥, 독산, 가리봉, 신림, 봉천)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
(관악출장소 관할)되면서 가리봉리와 독산리를 합쳐 행정동 명칭을 가리봉리의 「가」와
독산리의 「산」자를 따서 가산동이라 정했음
1968년 01월 01일 관악출장소 폐지로 영등포구에서 관할
1970년 05월 18일 관할구역변경조례에 의하여 가산동은 가리봉동으로 변경(법정동은 가리봉동, 독산동)함
1975년 10월 01일 독산동 지역울 분리 시켜 가리봉동사무소 설치
1977년 09월 01일 독산동 일부를 가리봉동에 편입 가리봉1동,2동 분동
1980년 04월 01일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1980년 07월 01일 가리봉1동에서 가리봉3동을 분동
1995년 03월 01일 금천구가 분구되면서 63년부터 70년도까지의 행정동명을 따서 가산동이라 하였음
(가리봉 2동 남쪽부분과 3동전지역을 금천구 가산동으로 개칭)
동유래
이미지1 이미지2

가산동의 본디 이름은 가리봉동이다. 1995년 3월 1일 금천구가 구로구에서 분리되면서 가리봉동의 일부는 구로구 관할로, 또 일부는 금천구 관할로 나눠져서 금천구 관할지역의 가리봉동 명칭을 가산동으로 바꾸었다.

가산동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63년 1월 1일 시흥군 동면 시흥리, 독산리, 가리봉리, 신림리, 봉천리를 서울특별시 영동포구로 편입하여 관악출산소 관할 아래 두면서 가리봉리와 독산리를 합쳐 가리봉리의『가』자와 독산리의 『산』자를 따서 행정동 명칭을 가산동이라 했다.

1970년 5월 18일 관할구역 변경조례에 의하여 가산동은 가리봉동으로 변경(법정동은 가리봉동, 독산동)했다. 그후 1975년 10월 1일 관할구역 변경시 가리봉동, 독산동으로 분리하여 각각 법정동명과 행정동명을 변경시켰다. 1995년 분구때 ′63년도부터 ′70년도까지의 행정동명을 따서 가산동이라 하였다.

그러면 예로부터 가리봉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를 찾아보기로 한다.

가리봉동은 이 마을 주위 작은 봉우리가 이어져 되었다고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말까지만 해도 가리산리(加理山里)이었다. 이와 유사한 지역명칭으로 지금은 경기도 광명시 학온동의 옛이름이 가리대리(加理大里)였다. 물론 이 곳도 금천현(시흥현) 관할이었기에 이곳에는 유사한 뜻을 가진 지역명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리봉동의 자연부락 이름을 알아보면 지금은 구로구 관할로 된 지역이지만 영일초등학교가 있는 지역을 곰말, 골말, 곡촌(谷村)으로 불리었다. 그리고 가리봉1동 지역을 대촌(大村)이라 불렀으며, 다시 지역마다 밤나무골, 사당골 등으로 불렀다. 지금의 가산동은 가리봉동 대촌의 한 부분이었으나 유일하게 가산동 18· 19통 지역은 택하(澤下), 못아래, 모아래 등으로 불리었다. 조선조 고종때 만들어진 시흥현 지도에는 지금의 두산아파트 자리를 송가택(宋家澤)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효자 송률해(宋律解)와 관련되어 송가택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여지도서(與地圖書)에 의하면 이곳은 원래 청룡(靑龍) 한 마리가 잠을 자고 있던 청룡혈(靑龍穴)의 산이었으나 갈증이 난 용이 물을 먹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던 중 자기가 잠을 자던 산 아랫쪽 땅속으로 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고 못을 파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저수지가 생겨났고 이 저수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그 아래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못아래 마을이라 하였다. 이를 한자로 풀어쓰면 택하(澤下)가 되며 후일 음이 변하여 모아래 또는 무아래로 되었다. 못아래 마을뒷산인 청룡혈(靑龍穴)에서 이어져 오는 작은 고개를 조마(弔馬)고개라고 한다. 고개라기보다는 작은 경사가 졌을 뿐 그 형체를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이곳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만 해도 제법 높은 고개였다. 이 고개는 청룡혈(靑龍穴)과 이어져 있는 용마혈(龍馬穴)로서 이곳에 위치한 마을이 그 기운을 받아 서울까지 뻗쳐 마치 서울을 수호하는 형국으로 되었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서울을 진격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뻗치는 기운 때문에 할 수 없었다. 왜장이 혈이 있는 부근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별종 한사람이 하얀 김이 솟아오르는 곳을 발견하고 왜장에게 알렸다. 왜장은 이곳이 고개의 혈(穴)임을 감지하여 들고 있던 칼로 이를 끊어버리자 부근에 서려있던 하얀 김도 없어지고 서울까지의 길도 환히 보이므로 단숨에 평양까지 쳐들어 갔다고 한다.

이후부터 이 고개에서는 서울을 수호하는 기운도, 마음을 지키는 정기도 없어졌기 때문에 혈(穴)을 지키던 용마(龍馬)의 죽음을 애도한다하여 조마(弔馬)고개로 되었다 한다.

자료담당부서 가산동 김사라 전화번호 02-2104-5533
최종수정일 : 2019. 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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